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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공 칼럼/관객 리뷰 | Posted by 아이공 2010/04/26 14:26

마야데렌展을 보내며...





본 리뷰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나눔지기 유사랑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출처] 마야데렌과 오마주展을 보내며|작성자 코알라


마야데렌展을 보내며


어제 저는, 이곳에 다녀왔어요. :0

 

개인적인 스케쥴과 건강상의 문제땜에 9시가 다 되서야 도착한 아이공ㅠㅠ

뒤늦게 도착해서 다 끝나있음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밴드의 공연은 처음부터 볼 수 있었어요~

 

맛있는 음식도 너무 많았고 (특히 홍보팀 승원님이 직접 만들어오셨다는 브라우니는 정말 짱! >_<)

준비된 와인때문인지 열기도 아주 후끈후끈했던 아이공의 파티~*

 

 

제가 만난 첫번째 밴드는 <개구리들>!!

 

 

완벽하진 않지만, 흥겨운~ 그들만의 음악을 들려주었는데요.

여성멤버들로만 이뤄진 밴드였는데 다들 호탕하시구 멘트도 너무 재밌었어요.ㅋ

홍대에 너무 일찍 도착하시는 바람에 "너무 많은 곳을 다니며 달리셨다"며

발개진 얼굴로 연주하시는 모습도 나름 귀여웠구요 ^^

(특히 당장 드럼을 뿌갤듯, 연주하시던 드럼연주자 분 너무 귀여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리만 다치지 않았다면 일어서서 한판 "춤"을 당겼을텐데 아쉽더라구요 :)

 

두번째 아티스트는 이미 꽤 유명하신 싱어송라이터 <소히>님이었어요.

모르시는 분들도 아마 광고를 통해 음악은 다들 접해보셨을텐데요.

실물과 라이브 연주, 모두 환상적이었어요. 안그래도 요즘, 다시 기타를 배워보려고

장롱위에 쳐박아놨던 기타를 꺼내놨었는데^^;; 더이상 미루지 말고 얼른 배워야겠어요.

여자가봐도 기타 치는 여자는 정말 아름답다는 +_+흐~

 

중요한 날에 깜빡 카메라를 놓고 가는바람에 ;; 저질폰카로...찍었지만..

음악은 잘 들린답니다^-^;; 체키럽!

 

 

차분한 목소리와 화려한 어쿠스틱기타 사운드의 조화가,

마야데렌전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소히님의 웨이브 머리와 자그마한 얼굴까지 왠지 마야데렌과 닮은듯^^?)

 

이번에 아주 저예산으로 뮤비를 찍으셨다구 자랑하셨던걸 기억하고 유툽서 날라왔어요.

 

 

어제 들은 노랜데도^^ 참 좋네요. 특히 가사가!

 

후끈후끈 열기가 가득했던 아이공의 댄스릴레이파티는

두 아티스트들의 공연 이후에도 뒤풀이 자리까지 쭉~ 이어졌다고하네요. :)

 

이런 파티를 통해  영화전이 단순히 그냥 영화상영의 자리로 끝나는게 아니라,

함께 즐기고 배울 수 있는 '문화'의 자리로 만든 점이 참 좋더라구요. :) 

 

처음엔 생소하던 댄스필름.

그리고 그것의 창시자였던 멋진 신여성, 마야데렌에 대해 알게 해주었던

아이공의 마야데렌展은 아쉽게도 오늘로 마무리가 되었어요 ㅠㅠ.. 더 많이 보러가지 못한게 아쉽네요..ㅠㅠ

 

그치만 아이공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쿨한 작품전을 잔뜩 준비하고 있단 사실!

 

5/27부터는 이름부터 제 맘을 두근두근대게 하는 "오노요코"展이 열릴 예정이랍니다.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을 원하신다면

기대만땅, 앞으로 펼쳐질 아이공의 행보에 함께 동참해보시는건 어떨까요? :)

 




본 리뷰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나눔지기 유사랑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출처]
마야데렌, 카메라를 위한 안무연구|작성자 코알라



"
stories
told by the body!"

 

 

 저번 포스팅에서는 마야데렌의 초현실주의적 작품, ‘오후의 올가미’를 다뤘었습니다. 하지만 미리 얘기했듯이 마야데렌은 댄스필름’의 창시자로 더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녀가 초현실주의 영화를 넘어, ‘댄스 필름의 창시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디딘 작품인 `'카메라를 위한 안무연구(A study in choreography for cinema)‘로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댄스필름’이란 개념은 저에게도 아직 친숙하지 않지만, 아이공의 설명과 나름의 구글링을 거쳐 “(댄스필름을 그대로 직역하여)‘춤영화’의 범주 안에 드는 모든 것”이라고 결론지어버리니 한결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텝업’이나 ‘빌리엘리어트’ 등의 춤이 소재로서만 기능하는 작품과 비슷하다기 보단 현대예술에서, 무용을 디지털미디어로 담는 장르인 ‘비디오댄스’혹은 ‘비디오퍼포먼스’등의 분야와 좀 더 친숙한 개념이 아닐까 이해했습니다. 실제로 영화감독인 마야데렌이 몸을 이해하는 방식은 직접 춤을 추는 무용수만큼이나 매우 정밀합니다. 역동적으로 존재하는 몸을, 비슷한 역동성으로 화면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몸과 춤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겁니다.

 


 영화는 약 4분 동안 춤을 추는 한 남자만 보여줍니다. 때로는 동작보다 느린 슬로모션으로, 때로는 무용수의 발보다 한발 앞선 느낌을 주는 빠른 템포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마치 카메라의 움직임이 춤, 그 자체가 되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시시하게 춤을 추는 남자를 단순히 ‘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춤을 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안무연구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라 ‘(춤이 추고 싶은)카메라를 위한 안무연구’로 지은 것이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잠시 펼쳐봤습니다.

 

 

 


 역시나 스토리가 없는 이 영화는 자칫 당신을 잠의 세계로 인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시만 편견을 버리시고. 뻗고, 구부리고, 휘어지고 있는 화면 속의 몸과 현란한 워킹을 구사하고 있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stories told by the body!" “몸이, 카메라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하고 말이죠. 감히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춤이란 것이 본래 인간의 소통에서 시작되었단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이 생기기 전부터 사람들은 ‘움직임’을 통해 감정을 표현해왔습니다. 마야데렌은 가장 원초적으로 서로 공감 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움직임’에 그렇게 집착했던걸까요?

 


  자,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말로도, 움직임 자체를 표현하기엔 부족하겠죠.)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던 지성, 시인 폴 발레리에게 춤은 그 자체가 시였습니다. 춤은 표현할 수 없는 꽃 혹은 구름의 한숨과 같은 것이었죠. 어렵게 말을 찾아내어 소리내지 않아도, 몸짓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할거라고 굳게 믿었을 마야 데렌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만족할 것이다. 아주 가끔, 진실이 시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그러한 때 당신이 혹시 내 영화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아니 단지 그 아우라만 이라도 떠올린다면 말이다…"(그녀의 작품모음집에서 프롤로그로 제시되는 내레이션 중에서..)

 

 

 

덧) 홍대 아이공에서 이번주말(4/25)까지 마야데렌전 절찬상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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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나눔지기 유사랑 님의 리뷰입니다.
[출처]
마야데렌, 오후의 올가미(Meshes of the Afternoon)|작성자 코알라



마야데렌, 오후의 올가미(Meshes of the Afternoon)






홍대에 있는 미디어극장
아이공(http://www.igong.org/)에서

‘마야데렌'의 작품전을 하고 있어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 저도 생소한 이름이었는데요. 그래서 나름의 뒷조사를 좀 해보았답니다.

이 사진 속의 미녀가 바로 마야데렌! 

 

 

 

아이공에서는 ‘댄스필름’의 창시자로 소개되고 있는 마야데렌은 사실

‘아방가르드’나 ‘초현실주의’와 같은 수식어와 어울리는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분이었어요.

단 여섯 편의 단편영화로 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전통을 부활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고요.

 

 

여기서 잠깐!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 영화는 192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초현실적인 내용의 실험영화들을 이야기해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탓에 보는 관객들을 조금은 힘들게 하는, 아주 아주 실험적인 작품들이죠.

 

 

아무튼 알고 보니 마야데렌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독립영화, 실험영화, 아방가르드영화의

기치를 올린 공로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분이셨어요!

특히 지금부터 소개할 1943년에 만들어진 13분짜리 흑백무성영화

 `오후의 올가미'(meshes of the afternoon)는 ‘영상으로 만든 시(詩)’,

‘꿈과 같은 황홀한 영화’등 으로 불리며 미국 독립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답니다. 

 

 

 

 

아주 오랜만에 본 흑백영화에요. 영화의 시작부터 흘러나오는 동양적인 현악기 소리의 배경음악이 인상적이었어요. 마야데렌의 남편 테이지 이토(Teiji Ito)가 나중에 덧입힌 음악이라던데, 기괴하고 음산한 음색이 영화의 분위기를 더 잘 살려주더라구요. 한 여자가 주인공으로 첫 등장하는데 얼굴이 낯이 익네요. 바로 마야데렌 감독 본인이 주인공을 맡았기때문! 

 

‘실험영화작가들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주도적인 경향은 몽환적인 연기와 몽유병자적인 배우에 있다.’ 는 말을 들은적이 있어요. (좋은 얘기라 적어두었던건데 아쉽게도 누가한 말인지는 아무래도 기억이 안나요ㅠ) 전적으로 동의해요. 실험영화들에서 자꾸 떠나가는 집중력을 잡아주는 건 그나마 배우이고 그래서 그 역할이 혁혁하거든요. 이 영화는 특히 감독 본인의 내면적인 이야기(꿈과 관련된)를 주제 삼고 있기에 본인이 연기하는 편이 가장 쉽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무튼 이 단편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게 되요.

(딱히 뚜렷한 서사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줄거리라는 표현이 적합할지 잘 모르겠지만요^^;)

  

한 여인이 길 위에 떨어진 꽃을 주워 자신의 집으로 들고 들어가요. 계단을 올라가 열쇠로 문을 따던 그녀는 열쇠를 떨어뜨리고 그 열쇠는 계단 아래로 떨어져요. 집에 들어서면 식탁 위에 빵과 식칼이 놓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어요. 여인은 의자에 쓰러져 잠이 드는데 꿈속에서 그녀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거울 얼굴을 한 기괴한 인물을 계속해서 쫓아가요.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 자신은 세 명의 인격으로 분리되요. 그 중 한명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순간 그녀는 어떤 남자에 의해 잠에서 풀려나요. 그러나 그녀의 현실세계는 꿈의 세계에 의해서 밀려나고 그 남자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있어요.

 

 

 본 그대로 서술한건데, 사실 저도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영화나 그림같은, 예술장르들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

잘 이해되지 않으면 왠지 기분이 좋지만은 않잖아요.

저같은 경우는 그럴 때, ‘내가 이해력이 딸리나?’이런 생각도 들어요. 근데 다행히

이런 초현실주의 혹은 아방가르드 영화는 보는 관객입장에서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대요.

이 대목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맞는 말 같아요. 예술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만드는 사람까지도 수용할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며 만들기 시작했죠. 그러다보니 이제는 예술이 자연스레 이해가 필요한 녀석들이 되버렸구요. 사실 예술이란거 잘 ‘느끼면’되는 거잖아요. 그동안 쉽게 받아들여졌던 많은 예술작품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 쉬웠던 녀석들(?) 덕분에 저만의 온전한 ‘감상’의 기회를 잃어버려왔던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덕분에 앞으론  '사고'하는 대신 '마음'을 활짝 열고 작품을 바라볼 수 있을거 같아요.

 

 

 영화는 한마디로 독특했어요. 우선 상업영화가 지닌 흔한 ‘이야기’ 구조, 즉 내러티브가 없었으니까요.

마야데렌은 우리가 산업이라고 말하는 영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대신 매체로서의 영화가 가진, 필름 고유의 감수성 을 탐구하려고 하죠.

그 방법으로 마야데렌은 가장 흔한 표현방법인 ‘이야기 구조’를 멀리하는 것을 선택해요.

인간이 가장 몰입하기 쉬운 이야기 구조를 배제함으로써

단순 ‘전달’과 ‘수용’ 과정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인식’을 자극하는 예술을 만들어 내려고 하죠.

거기서 끝이 아니라 마야데렌은 초현실주의작품->댄스필름으로 자신의 지평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점점 더 ‘예술다운’ 영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던거 같아요.

 

영화로서, 가장 원초적인 예술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분들에게 꼭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작품 리뷰 외에도 유사랑 님의 다양한 생각이 담긴 블로그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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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나눔지기 권영은 님의 리뷰입니다.
[출처]
그의 필모그래피|작성자 민트허브


<마야데렌과 오마주전> 특별 대담회 기록 

특별 프로그램

특별 대담 

4월 2일(금) 오후 7시 30분 마야 데렌의 영화세계

<변형시간의 의례 (15분,1946)> 상영 후 대담

대담자 : 김연호(미디어극장 아이공 디렉터,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집행위원장)

박동현(서울국제실험영화제 집행위언장,명지대 영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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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올가미>에서 보여준 마야데렌의 특징은 편집을 통해 공간 이동이었단다.

그러고 보니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다 열쇠가 갑자기 칼로 변화하기도 했다.

지금은 영화에서 흔한 공간 이동의 장면이 1940년대에는 새로운 시도 였을 수도 ...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작가들이 그 당시 미국에 있던 실험주의 영화에 많이 영화에 많이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마야데렌이 독보적었다고 한다. 꿈, 무의식을 자동 기술법으로 나타내려는 초현실주의에서 마야데렌은 이를 뛰어 넘으려 했단다.

이 부분에 대해 글도 많이 썼고, 그 결과로 <오후의 올가미>라는 작품이 나왔다고. 대담회 전에 본 <변형 시간의 의례>에 두 여자가 실뜨기를 하는데

이는 신화의 시작으로 보아야 하고, 그 뒤는 죽음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미국은 신화가 없는 나라로 국가의 신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단다.

애국주의 차원이 아니라 문화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자동기술법: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내려가는 방법

 

1920년대에는 시간 개념이 중요한데 뒤샹의 작품에도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을 찍었는데, 실제 대상의 누스는 보이지 않고 움직인 흐름만은 보여주었단다. 이렇게 필름을 찍으며 시간을 어떻게 제어할 지 고민을 했는데, 그 방법으로 음악, 무용 등이 접목되었고, 마야데렌은 무용을 선택한 것. 마야데렌은 공간에 주목하여

특히, 몸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관심을 가졌단다. <물위에서>에 나타나는 것은 하체는 물에 상페는 테이블에 있는 식으로 처음부터 이를 강하게 드러냈다고.

 

16mm 카마라를 이용한 것도 특징인데, 이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영화인들이 갤러리의 후원을 받아오던 것에서 개인이 모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좀 더 싸고 간편한 방법을 찾게 되었단다.그래서 선택한 게   정찰기에 달 수 있는 16mm 카메라. 카메라를 축소사면서도 이미지를 보전할 수 있는 최소 크기 였단다. 마야데렌이 혜택을 본 첫 세대라 할 수 있다고.

 

<판타지아>영화에는 추상적인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오스타피쉬모가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디즈니가 감당하기 힘들어 했단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받아들여졌고. 이는 미국 실험 영화에 유럽작가들의 실험주의가 어떻게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볼 수 있다고. 그 중 마야데렌의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미 미국에서 실험영화가 있었음에도 마야데렌의 새로운 스타일, 시선,기법이 특징이었단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이 흑인 참정권이 있기도 전이었다는 것을 비추어 봤을 때, 1940년대 영화에 흑민 배우가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단다. 남성주의 라는 판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마야데렌이 유일무이 하지 않을까라는데. 마야데렌 상도 있단다.

 

마야데렌이 왜 부두교까지 발전시켰는가?를 보면 무의식과 언어 사이에 신화가 만들어 졌는데, 마야데렌은 이에 주목했다는 것. <변형시간의 의례>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형상화 된 것들이 나타난단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조형화 된 것이 실제 인간으로 어떻게 움직임으로 나타날 지 고민했다고.

<밤의 눈>에야 비로소 이해가 될 만한 발레가 나오는데, 이는 별자리가 어떻게 생성되고 움직이는가를 신화를 통해 보여준다고.

 

* 질문: 초현실주의 영화 감상법?

초현실주의는 상징주의와 다르단다. 재미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게 중요하지 의미를 따지는 것은 소용 없다고. 자기의 시각이 주요하단다.

정확하게 감독의 의도를 알아내겠다는 감상법은 피해야 한단다. 감독 스스로도 얘기하지 않고. 그게 실험 여오하의 특징이라는데. 그래서 권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어떻게 하면 작가와 가깝게 영화를 읽어나갈까를 고민하거나, 관객 자신을 놓치지 않고 영화를 방법이란다.

 

휴~ 어렵다.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작품 리뷰 외에도 권영은 님의 다양한 생각이 담긴 블로그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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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나눔지기 권영은 님의 리뷰입니다.

[출처] Shall we dance?|작성자 민트허브


저랑, 함께 춤 추실래요?
sec2: 마야데렌의 시선- 디바인 호스맨: 아이티의 살아있는 신들'을 보고



남산을 같이 산책하던 중 "언니! 따라해봐~ 이게 섹시춤이야!" 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려 사람이 없나 확인한 친구가 이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섹시하게! "어맛~"나는 얼른 눈을 감아버린다. 민망하기 그지없다. 무슨 춤? 사춘기 이후였던가. 우아하게(?) 걷는 이상의 어떠한 몸의 흔들림도 허락지 않았는데, 춤은 무슨. 한 번은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나를 본 선배는 "귀신이 쓱~하고 지나가는 것 같다" 라며 놀라기도 했었다. 그런데. 체통 없이 무슨 춤이람? 그러니 그간 친구를 만난다는 건 지적고뇌가 담긴 얘기를 낮은 톤으로. 간간히 미소를 지어가는 활동이지, 춤을 추러간다거나 놀이를 한다거나 이런 건 어색한 일이었다. 그래도 클럽도, **랜드도 가보긴 했다. 성적표를 자세히 쳐다보니 "에어로빅 및 포크댄스"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과목도 수강한 적이 있더라. 그래. 나도 한 때는 노력해봤다. 몸을 움직이려고. 그러나 저변에 깔린 건 지극한 엄-숙-주-의!


이 엄숙주의를 깨야겠다 생각한 건. 그렇다. 진부하지만 연애 때문이다. '살사'를 배웠다는 그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보는 이를 전혀 고려치 않는 춤사위가 때와 장소와 없이 자신이 흥겨울 때, 음악이 허락했을 때, 애교를 부리고 싶을 때마다 터져 나온다. 그 순간 나는 여지없이 '어맛!' 하고 눈을 가려버린다.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민망한 것이다. 주말마다 가까운 살사바에 가자고 종용하는 그 친구에게 무슨 모텔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여자처럼(요즘도 이런 장면이 연출되던가?) 결사항전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함께 춤추러 가는 건 요원하지 싶다.


참으로 오래 기다리셨다! 이제, 마야데렌을 얘기를 하겠다. 아이티에서 직접 부두교 의식에 참가하며 춤과 노래에 심취해 제작했다는 다큐멘터리에는 나와 정반대에 선 마이데렌의 시선이 느껴지는 건 무리가 아니다. 한 종교적인 의식은 춤의 향연이라 할만 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로 춤을 쳤다. 북소리에 홀린 것인지, 실제로 그들이 믿는 신이 강림한 탓인지, 간혹 흥겨움이 지나쳐 보이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음식을 나눴고, 고민을 털었으며, 병을 고치고자 했고, 섹시한 동작으로 욕망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들의 종교의식과 춤을 사회․ 문화적으로 이해하자면 다양한 해석이 나오겠지만, 중요한 건, 마야데렌은 화려한 이들을 비추고 관객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시선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춤의 본질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근육질 금발의 백인이 화면을 메우는 게 아니라 가끔 화면도 쳐다보는 아이티인들이 출연한다.


이 시선의 차이는 뭐냐면 정형화되거나 유려한 춤만을 폼 잡고 구경을 하는 나와 카메라를 들었지만 자신이 그 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무아지경을 경험하려는 마야데렌. 춤을 추는 이와 관객 사이를 한 없이 멀게 놓고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이 아닌 춤추는 이가 곧 내가 되고, 어설픈 춤이란 건 없이 그저 몸의 반응에 충실히 따른다는 점이 차이이다. 그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감상한다는 건 아이티인 되기! 디바인 호스맨: 아이티의 살아있는 신들에서 내가 본 것 역시 마이데렌의 아이티인 되기! 였다. 이만하면 어설프지만 진실된 내 몸의 반응에는 한없이 무지하고 누군가의 움직임까지도 외면하는 나와는 확실히 다르지 않는가. 엄숙주의에 빠진 내게 그래도 다행인 건 마야데렌의 영화를 이번 영화제 내내 맘껏 구경하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덧붙여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렇게 주저리 글을 쓰는 것보다 음악 한 자락에 내 한 몸 내 맡길 수 있는 것이 용기! 살던 대로 살지 굳이 왜 그러고 싶냐고? 소박하게는 내가 좋아라 하는 그 녀석의 춤을 민망해 하지 않고 쳐다보기 위해서. 거창하게는 내 몸의 반응에 솔직해 짐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넓게는 세상을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우기 위해서.

그래. 나 이번 주 그 녀석을 따라 살사바에 가보련다. 아이티 사람들의 춤처럼 이상하다 사람들이 놀리면 어쩌지 걱정도 되지만 이미 '뻣뻣 대마왕'이라는 건 그녀석도 아는바고. 무아지경. 신과의 소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녀석과의 즐거운 시간만은 가지면 될 것 아닌가. 이만하면 '마야데렌과 오마주展' 제대로 감상을 시작한 것 같다. 만고 내 생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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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필름의 창시자 마야데렌과 오마주展

미디어극장 아이공 2010 3월 기획전

장소: 미디어극장 아이공

일시: 2010년 3월 23일(화) ~ 4월 24일(토)

마이데젠과 오마주전 안내 및 시간표: http://www.igong.org/webbs/view.php?board=notice&id=172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작품 리뷰 외에도 권영은 님의 다양한 생각이 담긴 블로그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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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약 40년이 흘렀다. 봇물 터지듯 많은 곳에서 여성에 의해 성차별적인 법, 문화, 관습 등 다양한 억압과 착취의 고리들이 사라져갔다. 여성은 인간의 역사 최초로 그렇게 주체적인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창조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 ‘여성주의’는 어떤 유행어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맞물리며, 여성의 성해방이 성상품화로 전략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간 여성주의 운동의 핵심과는 다르게 ‘사회’는 초자본주의로 극대화되어 여성간의 계급성이 더 뚜렷하게 증가하고, 분열되었다. 밸 훅스에 따르면, 미국 역시 여성간의 계급성이 상업화에 이용당하며, ‘그들’만의 여성주의를 미디어로 끌어들여 여성주의를 여성조차 오독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주의 안에서의 분열. 여성주의 세대간의 분쟁. 소통의 부재와 단절과 무관심. 서로 너무 굶주려 왔고, 그래서 너무 믿고 신뢰하고 있었기에 분열과 분쟁에서 오는 단절은 여성주의 운동가들에게 큰 상실감과 운동지표의 절망을 남겼던 것은 아닐까?

종교적 실천이 된 여성주의

여성주의자에게 ‘여성주의’는 세상을 보는 하나의 눈이며, 올바른 가치의 이정표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잣대가 된다. 그렇게 여성주의는 세상의 평등과 존중감의 문화를 만들고, 주체적으로 만든 문화를 실천하려 노력해왔다. 여성주의자인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던 것도 여성주의를 나누고, 실천하고, 공유하는 몫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그 순간까지도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가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던 게’ 여성주의자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성주의자로서의 자기검열과 끊임없는 실천가로서의 행동은 종교의 성인들이 행하였던 태도와 닮아있다.

불교에서는 계율이 있다. 그 계율에 맞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세상을 지혜롭게 보는 자, 자비로운 자가 되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다. 천주교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겐 평생의 수도와 더불어 금욕적인 삶, 무소유가 원천인 계율이 있다. 그 계율을 실천하고 만물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섬기려면 맑은 영혼을 유지해야 하고, 끊임없이 심신을 수련해야 한다. 교회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계율이 있다. 종교의 계율을 삶 속에서 항상 수련하고, 실천해야 하는 종교계의 성지자들은 그렇게 평생 세속과는 별개의 세상에서 ‘도’를 닦으며 살고 있다.

여성주의에도 알게 모르게 서로간의 계율이 있다. 존중감에 대한 가치, 불평등한 조건에 대한 잣대, 어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여성주의 실천에는 암묵적인 상당히 주관적인 계율이 존재한다. 그것은 한 개인에서부터 각 단체로까지 넘나든다. 각 단체마다 서로 지켰으면 하는 내규나 약속들도 계율이고, 한 여성주의자가 스스로의 자기검열을 통해 만든 여성주의적 기준도 계율이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로서 살려면 그리고 또 욕먹지 않으려면 그 많은 계율을 지켜야 하고, 어느 순간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인인지, 여성주의자인지…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날 여성주의 논쟁을 하던 친구가 말한다.
“이 판이 얼마나 작은지 알아? 뭐 하나 잘못하면 금방 소문나. ××도 조심해.”
우리는 여성주의 운동을 왜 하는 것일까? 주관적인 여성주의 계율로 잣대를 만드는 행위가 여성주의 운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해방과 행복을 찾고, 서로에 대한 존중감을 찾고자했던 여성주의 운동은 지금 현재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상상적 공동체로의 여성주의
: 서로 다른 정치적 올바름과 교조적 시선


일흔이 넘은 할머니를 ‘여성주의자’로 끌어들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니 과연 여성주의자로 끌어들인다는 표현이 맞는 것인가? 이 말에도 이미 교조적인 나의 여성주의적인 오만함이 담겨있는 건 아닌가? 나는 어느 날, 이 땅의 수많은 빈곤한 나이든 여성인 할머니와 여성주의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다가구주택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할머니와 닉네임을 부르며 ‘야, 자’해보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또 문득 과연 그게 올바른 것일까라는 의문과 화두가 머리 한쪽을 꽉 채운다. 과연 이러한 실천적 제언으로 할머니들에게 여성주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적인 문화적 계율은 여성주의 단체뿐 아니라 다른 단체에서도 활용할 정도로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성주의 영역에서 활동을 하다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되는 것이 호칭과 나이 문화, 배려 문화다. 내가 다른 세계에 있다 온듯한 문화적 이질감, 세상(세속?)의 문화가 왜 그렇게 낯설고, 일방적인지, 답답한 느낌까지 든다. 어느 순간 입에서 탄식이 나온다. 어느덧 여성주의자로의 삶과 그냥 인간 여성으로의 삶이라는 이중의 옷을 입는다. 그 사이의 혼란함. 머리 한쪽에서는 ‘그녀/그를 여성주의자로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하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교조적인 시선과 생각을 하고 있는 자 자신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주의 삶에 대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체화되고, 여성주의 상상의 공동체와 세속(?)의 사이에서 질펀하게 고민을 해댄다.

어느 누구는 ‘정치적 올바름’을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은 여성주의적 계율만큼이나 주관적이고, 기준도 제각각이다. 오히려 나는 여성주의적인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도량과 행위와 실천을 말하는 건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여성주의적 정치적 올바름이다, 아니다’의 저울 앞에서 우리는 그 잣대의 기준을 제대로 갖고 있기는 한 것일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어느 여성은 소위 ‘쎈’ 성격을 갖고 있는 쉰 살의 여성주의자다. 그녀의 성격은 약간 다혈질에 독선적이지만, 인생의 깊이가 있고, 여성에 대한 애정과 신뢰, 자는 시간을 빼면 인생의 대부분을 여성인권에 전력질주하며 가부장제와 직접 맞서고 행동해온 열혈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의 ‘쎈’ 성격이 가끔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 위에 놓인다. 또 다른 여성은 스폰지같이 성품이 좋은 주관이 뚜렷한 서른 중반의 여성이다. 그녀의 성격이 부처와 같아 화 한번 낸 것을 본 사람도 없고, 항상 웃는 얼굴로 많은 이를 반겨 여성, 여성주의자, 남성 할 것 없이 그녀를 보면 너무 편안하고 좋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정치적 올바름을 갖고 있는 여성주의자는 누구일까? ‘쎈’ 성격의 여성주의자인가? 아니면, 스폰지같이 성품이 좋은 여성인가? 사람마다 그 개인의 역사를 살며 생겨난 성격, 취향, 경험, 말버릇, 환경의 차이가 있다. 여성주의자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사람마다 잘 맞는 성격이 있고, 취향이 있고, 말버릇이 있다. 그러나 가끔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혹은 서로 경험이나 환경이 달라서 싸우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들이 여성주의로 모두 환원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여성주의자가 왜 (성격이) 그래?’, ‘여성주의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건 여성주의적인 게 아닌 거 아냐?’ 어떤 여성주의 활동가가 ‘상처와 치유가 여성주의를 잡아먹은 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서로 성격이 달라서 싸운 걸 여성주의로 환원하면서 여성주의 안에 상처와 치유가 넘쳐난 걸 이렇게 비유한 듯하다.

그 어느 누구도 어떤 잣대로 여성주의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누구는 갖고 있고, 누구는 없다고 할 수 없다. 여성주의적인 정치적 올바름은 지금까지의 몫처럼, 스스로 깨달은 만큼 나아가고, 실천하며, 아는 만큼 반성하고 행동하는 각자 스스로만이 그 깊이와 올바름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여성주의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여성주의자로 칭하지 않지만 반성차별주의에 대한 생활 실천을 하고 있다면 그 사실 역시도 중요한 것이다. 깨달은 만큼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여성주의 대중운동은 가능한가?

약 40년간 진행된 여성주의 운동이 좋은 거라면, 지금쯤 전세계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주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며 더 나누고, 공유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여성주의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은 여성주의에 대해 모르거나, 여성 마초들의 모임이라고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좋은 것을 내 어머니하고도 많이 나누지 못했고, 친언니들하고도 많이 나누지 못하고 있다. 세대를 지나 지금쯤은 40년 전보다 더 많고 넘쳐야 할 언니들이 있어야 하는데, 언니들은 점점 사라지고, ‘사회’로 진출하며 ‘나도 한때는 그랬지’로 변해버렸다.

미디어는 여성과 여성주의를 교묘하게 배합하며 사회로 진출한 여성을 이미지화하는데, 상사가 여성인 경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미란다)이 되어 사악한 여성주의자로 변하게 만들거나, <스타일>의 김혜수(박기자)와 같이 다재다능한 커리어우먼형 여성주의자를 만든다. 이런 커리어우먼형의 여성들이 ‘사회형 여성주의자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라는 단어는 반성차별주의자, 성해방운동이라는 본뜻보다는, ‘남성의 권력을 가지려는 여성들’이라는 말뜻으로 대중화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왜곡된 여성주의를 어떻게 다시 환기시키고, 여성주의 대중운동의 초석을 다질 수 있을까?

여성주의 상상의 공동체에 알게 모르게 생긴 주관적 계율과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가 부담이 된 것은 아닐까?
오늘날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여성들과 여성주의를 공유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여성주의 세대간의 갈등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인가?
여성주의와 계급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반성차별주의 운동인 여성주의 운동이 제2의 반성차별주의 운동인 성노동자 운동을 왜 별개의 것으로 보는가?
일상으로의 여성주의 운동, 우리는 어떤 커다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머리 속에서 여성주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펼쳐진다. 성차별이 이 지구상에, 아니, 온 우주에서도 없어지는 그날까지, 여성주의 운동은 아마도 숨을 쉬고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힘을 빼고 상상을 해본다.

* 이미지 출처(순서대로)
http://stuff4restaurants.com/blog2/2008/02/12/truely-awfull-metaphors/
http://www.boston.com/bigpicture/2009/03/holi_the_festival_of_colors.html
http://www.flickr.com/photos/camerachick/2894872021/

언니네 채널넷 칼럼 페미백미에 2009년 12월에 김연호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2006/10/25

뉴미디어로 만나는 뉴장르 공공예술

공공미술은 있는가? 공공미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내 미술영역에서 소개되는 공공미술 전시와 행사에서 나는 사회성과 정치적 맥락을 함께 읽을 수 있는 공공미술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너무나 많은 아젠다가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도시와 시민’이라는 주제를 벗어난 공공미술이 몇 번이나 열렸을까. 영어로 ‘art’로 통일되는 예술과 미술. 예술과 미술은 같은 낱말이지만, 국내에서 미술은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또 다른 문화영역으로 읽혀지곤 한다. 한 문화영역에 갇힌 미술은 개방적이지도, 취향적이지도, 다양하지도 못하다. 관점 없는 공공미술은 얼마나 황량한가. 황량함. 공공미술을 볼 때 느끼는 감정. 그건 진정성도 영혼도 치열함도 느껴지지 않는 화려한 마네킹을 보고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액티비즘 정신없이 공공미술을 할 수 있을까? 소수자와 약자에게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한 재고 없이 공공미술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일.반.적.시.민.을 대상으로 미술작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공미술의 모든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일반적 시민은 누구인가? 서구 중심에서 일어난 1970년대의 해방운동은 그 일반적 시민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부당함과 인권침해를 받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 시기에 수전 레이시는 기존 공공미술의 부폐와 수동성에서 벗어난 뉴장르 공공미술을 새롭게 개념화했다. 행동주의, 여성, 노동, 인권,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관점과 시각으로 조형물이 아닌 행동과 함께 선보이는 것. 공공미술에서 보아왔던 90%의 부족함이 바로 이 지점이다.

자신의 관점과 시각이 없다는 것. 자신만의 장르와 뉴미디어성에 대한 부재. 공공미술가와 얘기했을 때 그가 갖고 있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편견을 대하곤 깜짝 놀랐었다. 과연 그 시각은 공공미술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앵벌이를 측은하게 보는 시각, 이주노동자를 불쌍하게 보는 시각, 한미FTA저지운동은 운동가의 몫이라 생각하는 시각, 아직도 페미니즘을 하고 있냐는 시각, 성적소수자를 변태로 보고 있는 시각, 아이의 언어를 미성숙함으로 보는 시각. 이 지점들이 빠져있는 공공미술을 보면서, 답답함과 막혀있음과 고여있음이 느껴지면서, 그들만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지는 미술영역은 나를 감동시키지도, 그렇다고 긍정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서울 뉴미디어 페스티벌은 모든 사람이 출품이 가능하다. 그중에는 전문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백수 등 다양한 직업군을 가지고 있다. 전문 뉴미디어아티스트보다 고등학생의 작업에서 더 뛰어난 독창성을 발견하고, 진정성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꽤 있다. 뉴미디어아트를 하는 전문인은 자신의 영상문체를 발견하려고 하기보다, 유명한 아티스트를 모방하거나, 전자와 기술적인 면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뉴미디어아트로 무엇을 할 것인가? 뉴미디어아트를 왜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자신만의 관점과 시각을 뉴미디어아트로 고찰하고자 하는 지점이 아닐까한다. 뉴미디어라는 기술에 매몰되면, 엔지니어일 뿐이다. 즉, 신기술의 화려함과 호기심에 매혹된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 식상해진다. 1970년대 해방운동 시기에 제작된 행동주의 예술가의 작품들은 화려하거나,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갖고 있는 관점의 진정성과 영혼 깃듬의 흔적들이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오는 11월 17일부터 25일까지 홍대 앞에서 열릴 서울 뉴미디어 페스티벌은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관점과 시각, 자신만의 장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뉴미디어로 자신의 목소리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미디어, 감성을 요리하다’라는 슬로건은 뉴미디어의 감성을 공유하고자 함이다. 뉴미디어는 예술분야를 공공으로 확대시키고, 수동적 관객에서 능동적 관객으로 전환시키며, 프로슈머라는 확장된 개념의 관객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 뉴미디어로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신만의 뉴미디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이것이 뉴미디어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소통이 아니겠는가.

김연호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대표
제6회 서울 뉴미디어 페스티벌 집행위원장


* 월간미술 2006년 10월호에 실린 김연호님의 기고문입니다.


2010년을 열었던 아이공의 바바라 해머 회고전,
다녀가신 관객분들이 저마다 정성스레 관객 설문에 응해주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대사, 바바라 해머에게 보내고픈 메시지 등 여러 가지 질문에
차~암 좋은 내용으로 답해주셨어요.
그럼 바바라 해머 영화를 본 관객들의 따로 또 같은 생각들. 한 번 만나보실까요?


1. 각 영화별 기억에 남는 대사 Best
(섹션별로 15~50장 정도의 설문지가 수합되었고, 그 내용을 토대로 가장 많이 응답한 내용을 모았습니다~*)

* 레즈비언 에로티카, 나쁜 두 딸들, 레즈비언 세계사 섹션

 "I Know you I love you, knowing you, Loving you" 
- '알아가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에 대한 반응이 총 5분 계셨네요. 역시 몸의 사랑, 마음의 사랑을 다룬 작품 다운 결과 아닐까요? 


* 아웃 인 남아프리카

"바이섹슈얼이란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를 위한 세상이 열린 듯 했어요."
나를 설명해줄 언어가 있다는 것. 그를 통한 만족은 어쩌면 꽤 공통적인 감정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대사에 감명을 받은 분들이 총 4분 계셨습니다. 그 외에도
"내가 게이라는 걸 꼭 가족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는 대사를 기억해주신 분도 3분이 계셨는데요. 커밍아웃에 대한 남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 영화가 1990년대에 제작되었음에 불구하고 2000년대 한국의 관객분들이 같은 이슈에 공감하고 계시네요.

* 여성의 옷장
"여성 예술가가 옷장 안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영화 속 세번째 여성예술가인 니콜 아이젠만이 한 말이네요. 그녀들의 예술이 결국 삶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을 담은 말 같군요.

* 연인, 타인
"만약 이 세상에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다."라는 말은 이 영화가 다루는 클로드 커훈이 2차 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하던 문서에 담겨있던 내용입니다. 실은 "만약 이 세상에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전쟁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들이다."에 대구를 맞추어 나온 대사임을 상기하면 더욱 인상적인데요. 레즈비언으로서,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살기 위한 그녀의 삶의 최전선을 드러내주는 말인 것 같네요. 멋진 대사가 많았던 <연인, 타인>에서는 그 외에도 "You love me and I'm free.",
"정체성은 연기하는 것이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등의 대사를 각기 4분, 3분이 꼽아주셨습니다.

* 말이 아닌 은유, 제주도 해녀 섹션
'Thank you" - 고마워요. 총 4분, 마지막 씬에서 강아지 spooner의 사진에 같이 나오는 말이라고 하네요~


* 저항하는 파라다이스
"고문을 경험해보지 않고 그 상황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문서는 문명의 기록이며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다" 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

* 질산염 키스
"Language organizes sexuality"
'언어가 성을 구성한다.'는 의미의 이 말은 질산염 키스가 "기존의 성을 재구성"하는 내용의 영화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했을 것 같네요. 총 7분이 본 대사를 꼽아주셨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사도 2분이 정확히 기억해주셨네요^^




2. 바바라 해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

와 아이공을 찾으신 분들의 영어는 너무나 능~숙하시네요.
올리는 저도 반은 읽고 반은 추측하네요. 그렇지만
감사, 응원, 영화를 통해 받은 찡한 마음들 모두 잘 전달될 수 있겠죠? 


 

당신은 우리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되어주었어요. 고마워요.

용추예요. 한국에서 당신의 작품을 보니 반가워요. 작품들이 당신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보며 혼자 웃었답니다. 모두  아름답고 힘을 주며 순수했어요. 당신의 영혼처럼.

기운을 얻네요!

용기있는 여자.

당신의 새 책 <해머>를 읽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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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남겨주신 몇몇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티스틱한 그림이었답니다.


오우!

오우!!

오, 오우!!!!!


 

섬세한 펜터치

우아한 능선


3. 자유로운 느낌들











우리는 왜 ‘행동주의 길거리 예술 퍼포먼스’를 하였는가!
- 김홍석 예술은 죽었다

 

 

  5월 18일 국제 갤러리 앞에서 <인간 말종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이 퍼포먼스는 김홍석의 <밖으로 들어가기>라는 전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해학적으로 풍자하기 위한 행동주의 예술 퍼포먼스였다. 김홍석은 자본주의 비판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소수자들을 희롱하고, 조롱하기 일색이다. <밖으로 들어가기>의 뉘앙스가 자본주의를 향한 비판이라 하는데, 이 부분이 김홍석이 관객에게 바라는 얄팍한 속임수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홍석은 국제갤러리라는 상업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자본주의 예술가이며, 이미 문화자본, 예술자본의 권력계급에 속해있다.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거액으로 거래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이 전시의 오류와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작가의 말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있어 자본주의가들을 비판하고 있다기보다 그 안에서 억압기제를 갖고 있는 소수자 코드를 사용하고, 소수자를 멸시하는 위험한 발상을 했다는 것.


 2. 김홍석이 사용한 소수성에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했을 때,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하기보다 회피, 변명, 차단 행위를 하여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

 

 3. <밖으로 들어가기>라는 의도와 다르게 국제 갤러리에서 정말 소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국제 갤러리와 담합하여 갤러리 문을 닫았다는 것.

 

  이 전시는 김홍석 스스로가 자본주의 예술가임을 커밍아웃하고,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인간의 야만성을 화이트박스에 그대로 풀어낸 것이다. 즉, 본 전시는 상업화랑인 국제갤러리에서 전시하면서 그 스스로가 자본주의 예술가가 되고 있는 상황을 풀어내고 있기에, 그 안에서 ‘자본주의 비판의식을 읽는다’ 또는 ‘김홍석의 인간의 소수자적 성찰적 메시지’를 읽는다는 것은 오류이며 불가능하다.

  오프닝에서 (post 1945) 의 한 퍼포밍으로 진행한 ‘창녀찾기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김홍석이 예술작품에서 주로 사용한다는 ‘진짜와 가짜를 찾아봐’라는 속임수 게임은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즉, 용기 없고, 숨어버리는 ‘자신 없음’, 책임을 회피한 행위이다. 창녀찾기 퍼포먼스 역시 관객에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보라는 작가의 선동성이 드러나고 있는데, 실제로 주목해야하는 진짜와 가짜는 김홍석의 작품에 드러난 텍스트이다. 김홍석의 머리 안으로 들어가서 ‘왜 이 전시를 했는가’에 집중하기보다, <밖으로 들어가기>에 드러난 텍스트에 집중하면, 김홍석의 전시가 갖고 있는 얄팍한 야만성이 쉽게 보인다.

 

(문제시된 post 1945  )


 (본 전시의 기획의도)

 

 일단 김홍석의 본 전시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예술이 죽었다’는 구시대의 헤겔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행동주의 길거리 예술 퍼포먼스를 진행한 것은 구시대 발상의 김홍석의 전시가 자본주의 뻥튀기처럼 똑같은 논리로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서구의 어느 시대이건 화이트박스가 갖고 있는 권력은 대단했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예술 안에서 예술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의 권력은 예술의 정신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밖으로 들어가기>가 나쁜 전시인 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전시라고 해놓고, 자본주의가들을 비판하기는 커녕, 자본주의 안에서 살고 있는 약자와 소수자들을 대상화하고, 소재화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조롱을 ‘창녀찾기 퍼포먼스’로 현실화한 부분에서 그 야만적 예술의 끝을 보는 듯하다. 우려하는 부분은 자본주의 예술 안에서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을 언제든지 이용가능할 수 있고, 소재화할 수 있다는 씨앗을 세상에 회자 될 만큼 김홍석이라는 공인의 예술가가 뿌렸다는 것이다. 이 전시가 좋은 예술로 미술계에서 인정된다면,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김홍석과 비슷한 논리로 제2의 김홍석이 되어 화이트 박스에서 야만적인 예술행태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입장과 공개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 

 

( 이외의 전시에서 보여준 김홍석의 텍스트 1)

 

( 이외의 전시에서 보여준 김홍석의 텍스트 2)

 

  행동주의 길거리 예술 퍼포먼스인 <인간 말종 퍼포먼스>는 김홍석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국제갤러리 앞에서 진행되었다. 약 한 시간동안 약 40여명의 프로슈머적인 행동주의 시민 예술가들이 모여서 행위예술을 진행하였다. 김홍석이 잘나서라기보다, 그 야만성에 놀라서 ‘진짜’와 ‘가짜’ 사이에 감춰진 김홍석의 인권감수성, 젠더감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예술 퍼포먼스였다. 행동주의 시민 예술가가 주체가 되어 진행된 본 퍼포먼스는 김홍석에게 집중하기보다,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게릴라 형식으로 진행한 이 퍼포먼스는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웹2.0의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함께 공유하며 진행되었다.

 

(성명서 낭독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우리들)

 

(레이가 개작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우리들)

 

(여지블모의 퍼포먼스를 즐기고 있는 참가자들)

 

(피켓 나들이를 하고 있는 우리들)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고급 예술가들과 갤러리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화이트박스에서 나와 대안 장소에서 낙선전을 진행했던 것처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고급예술에 반기를 들고,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카페와 대안공간 및 길거리에서 진행했던 것처럼, 행동주의 예술가들이 길거리에서 예술을 보여준 것처럼, 우리 역시 행동주의 예술 퍼포먼스로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내었다. 어느 시대이든지, 예술 속의 아비투스, 투쟁의 장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대안의 예술 형태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어떤 특권계층의 예술가들만 향유할 수 있다는 예술 논리가 없어진지 오래다. 그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행해지는 예술을 새로운 예술, 작가의 자율권으로 인정하는 틀에 갇힌다면, 그 시대의 예술은 성숙할 수 없다.

 

(우리의 입장을 막고 있는 국제갤러리)

 

  김홍석의 예술이 화이트박스에서 죽어있음을 공포하였다면, 우리는 길거리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살아있음을 예술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피날레는 김홍석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국제갤러리를 도는 것이었다. 국제갤러리 측에서 문을 닫았다. 그 시각이 오후 2시 30분 정도였다. 우리의 작은 행동과 목소리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큐레이터가 말했다.

  약간의 설전 끝에 우리는 국제 갤러리에 들어가 ‘김홍석을 찾으면 120원을 드립니다’를 진행하였고, 몇 가지 상황이 해프닝처럼 진행되었다.

 

(작품 post 1945의 금고에 우리는 120원을 넣었다)

 

(급하게 작품에 손대지 말고, 찍지도 말라고 저지하고 있는 큐레이터)

 

국제갤러리 측의 큐레이터에게 말했다.
우리 왈: 내가 창녀이니 60만원을 주고, 이 사람이 찾았으니 120만원을 주세요.
큐레이터 왈: 그것은 오프닝 때 퍼포먼스였습니다.
우리 왈: 주지 않을 거면, 저 벽에 붙어있는 저 텍스트를 떼세요.
큐레이터 왈: 작품이기 때문에 손을 댈 수도 뗄 수도 없습니다.

 

  왜 나의 귀에는 이 말이 ‘우리는 인권보다도 작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들릴까.

 

  살아있는 인간을 화이트박스 갤러리에서 살해하고 난도질해 놓고,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고’ 항변하면, 김홍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인간의 생명보다 나의 예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전시는 인간의 야만성을 비판하기 위해 진행된 퍼포먼스입니다’

 

 더 늦기 전에 김홍석과 김홍석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작품을 소개한 국제 갤러리의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바이다.

 

 

(국제갤러리 안에서 폼잡으며 한장)

 

(갤러리에서 나와 피날레 장식!)

 


미디어 X파일 VOL.3

하바나 블루스, 언어와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김연호

     (온라인 이프 미디어 칼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하바나 블루스>(베니토 잠브라노 감독)를 보았다.

쿠바에서 이미 <하바나 블루스>를 보고 온 정호현 감독의 추천으로 보게 된 쿠바 영화다. 반미 열풍 중인 남미. 반미와 함께 한 역사를 갖고 있는 쿠바는 급물살을 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역풍으로 대안형 체제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하바나 블루스>에는 쿠바인의 일상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미국과 국교를 단절한 쿠바 역사는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한국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있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체 게바라. 그리고 민중과 함께 이루어낸 민주주의 혁명. 이 역사를 보면서, ‘자주’를 이야기하면서 자주적이지 못한 사고와 이념에 푹 절어있는 한국을 느낀다.
한번쯤은 다른 나라에 구애받지 않고, 민중이 생각한 국가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후세에 남겨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도, 왜 그런지 우리나라엔 ‘자주’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고 있는 쿠바의 행보가 여간 부럽고, 궁금하다. 미국의 경제봉쇄정책(쿠바민주화법/쿠바자유민주연대법)과 소련 해체, 끊긴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으로 쿠바농업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유기농법으로 변모하였다. 그래서 많이들 쿠바농업하면, 친환경 농업 혁명을 이야기 한다.

친환경 농업혁명의 메카로 자리 잡은 쿠바.

근데 왜 쿠바인들은 미국으로 밀향을 할까.

<하바나 블루스>를 통해 잠깐 쿠바를 살펴보자.
친환경 농업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몸매짱이란다. <하바나 블루스>에는 주인공 루이와 티토를 필두로 탄력있는 구리빛 피부의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부유한 국가에서 이만한 몸매를 만들려면, 아마도 엄청난 돈이 지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 탄력있는 몸매로 흥겹게 춤을 춘다. 쿠바를 직접 갔다 온 적은 없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집집마다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와 자동차를 타도, 길을 걷고 있어도 리듬에 맞춰서 걷고, 운전하고, 얘기하고 한단다. 젊은 여성과 남성들은 수준급으로 음악을 하고, 춤을 추고, 주말만 되면 파티장으로 가는 것이 일상. 자, 여기까지는 꿈만 같은 이야기다. 하루에 8시간이상의 노동으로 지친일상을 보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과는 전혀 다른 딴판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쿠바인들은 미국으로 또는 유럽으로 밀향한다. 얼마 전 북한에서 탈출(?)한 인민 약 20여명이 미국에 망명신청을 했다. 북한인민이 못 먹고, 굶주리고 있는 까닭이 미국의 경제봉쇄정책과도 관련이 있음에도 국내의 미디어에서는 김정일 탓만 한다.

쿠바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제봉쇄정책으로 아무리 자급자족하는 농업이라고 해도 가난한 것이다. 티토의 차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 것. 가던 차가 갑자기 멈추는 것. 텔레비전보다는 라디오가 친한 것. 조금 더 맛있고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은 것. 조금 더 멋있고, 쿨한 옷을 입고 싶은 것. 핸드폰, 캠코더, 인터넷하는 것이 힘든 것. 미국과 유럽의 자원 약탈로 인해 쿠바를 비롯한 남미는 늘 가난한 생활을 했었다.
현재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반미경제동맹 선언 등을 통해 남미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국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반미한다면 무조건 매국노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남미의 이러한 행보는 민중에게 얼마나 큰 자긍심을 줄까 생각해본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의 가난한 민중과 함께하는 정치는 일부 부르주아에게는 악당으로 취급되지만, 이만한 가치있는 정치가 어디에 또 있을까.
자국민이 아닌 미군을 위해 자국민의 피와 땀이 섞인 평택의 대추리 땅을 미군에게 받치는 정치. 민간인을 시위대라 칭하며, ‘시위대가 군부대를 몽둥이로 때려 군인 여러 명 중상’이라고 쓰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왜 이렇게 밖에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일까. 총 칼 방패로 무장을 한 군부대에 대응하고자 나무로 된 몽둥이로 대추리를 지키고자 한 민간인을 적으로 모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하비나 블루스>에서 루이가 부르는 노래가사는 단순한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쿠바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 노래가사가 어찌나 은유적이고, 시같은지 가슴을 울리고 나를 울렸다. <하바나 블루스>의 노래. 자신이 민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n tadas par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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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방랑안에
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딜라마이고
나와 만나는 그 곳, 그 지역이
바로 나의 땅이다.
너의 땅이며 나의 땅인 것이다.

만약 나의 보호가 필요하다면
난 너의 외투가 되어 줄 것이다
나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면
난 너의 둥지가 되어 줄 것이다
그 어느 곳에 있던지 나는 너를 잊지 않고
너와 함께 할 것이다

........

세상의 땅엔 경계들이 있지만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이
너를... 영원히 비쳐줄 것이다

........

어디에 살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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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나 블루스와 쿠바: femijung